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트 모차르트 (문단 편집) == 레오폴트와 아들 볼프강[* 여기 있는 내용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에 좀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은 주로 레오폴트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 막내아들 볼프강은 타고난 음악 천재였는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고 단순히 누나(나넬)가 아버지에게 음악 레슨을 받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것만 가지고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까지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챈 레오폴트는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를 희생하는 대신 나넬과 볼프강의 음악교육과 출세를 위해 연주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잘츠부르크는 너무 작은 동네였기 때문에 좀더 큰 무대에 진출시키고 싶었던 것. 이 연주여행 덕분에 두 남매의 음악적 재능이 유럽 전역에 알려졌으며 귀족들은 앞다투어 이 남매를 초대했다.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나[*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 이 때 벌어진 유명한 일화에 대해서는 모차르트 항목 참조.]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와 같은 매우 높으신 분들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가족의 연주여행은 총 3차례 이루어졌는데, 1, 2차 연주여행에서는 온 가족이 동행했으나 이탈리아를 순회했던 3차 연주여행에서는 이미 사춘기를 지난데다 음악교사로 취직한 나넬과 부인은 동행하지 않고 아빠와 아들만 참여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5살의 꼬마였던 볼프강은 3차여행을 시작할 무렵 어느덧 13살이 되었는데, 레오폴트는 '신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아들이 어린 시기를 넘기기 전에 어떻게든 취직을 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볼프강이 이 3차 여행에서 이후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을 얻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 3번의 구직 여행이 성과없이 끝나자 볼프강은 15살경에 결국 아버지가 있는 잘츠부르크의 궁정음악가로 취직했으며 이후 1781년까지 약 10년가량 이 직책에 있었다. 그런데 1772년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백작으로 바뀌면서 볼프강의 인생도 반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이 콜로레도 대주교는 굉장히 권위적이고 꼰대스러운데다 예술에 대한 이해력이나 조예도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대주교라는 직책 때문인지 예식을 위한 종교음악 이외의 다른 음악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나 월급도 매우 박했다. 재능과 혈기가 넘쳤던 젊은 음악가 볼프강이 이처럼 음악에 관심 없는 상전과 충돌을 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귀족 집안의 하인으로 시작해서 어렵게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온갖 찬사와 각광을 받았던 볼프강은 까다로운 궁정 예법이나 귀족들의 꼰대질을 견뎌내지 못했고 그들의 비위를 맞출 생각도 전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들과 대주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레오폴트는 계속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볼프강은 하루빨리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며 궁정 음악가 자리를 몇달씩 비워놓고 뮌헨/빈/파리 등의 대도시를 다니면서 부지런히 구직활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궁정음악가 자리를 팽개치고 구직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레오폴트도 아들과 동행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려 했지만 '''"넌 그 동시에 해고"'''라는 통보를 받고 물릴 수밖에 없었으며 대신 자신의 부인이 아들을 따라나섰다. 이처럼 애타게 구직을 했건만 이렇다 할 인맥도 없었고 나이가 들면서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고 있었던 볼프강의 구직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 와중에 모친 안나 마리아가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전염병으로 [[객사]]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모친의 사망 이후 볼프강은 레오폴트의 간청으로 억지로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로 재취업하지만 이미 마음은 그 동네를 완전히 떠난지 오래였다. 복귀한지 2년만인 1781년 볼프강은 기어이 대주교와 담판을 짓고 궁정음악가 자리를 던져 버렸으며, 곧장 빈으로 가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나마 아들이 빈에 가서 부친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결혼문제로 또 속을 썩였다. 빈에 간 이듬해인 1782년 볼프강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머무르던 여관 주인의 딸이었던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레오폴트는 볼프강이 이왕 빈에 간 김에 제대로 출세해서 좀더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당연히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결국 볼프강과 콘스탄체가 결혼하자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콘스탄체를 며느리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이로 인해 부자가 완전히 절연한 것은 아니었고 음악과 관련해서는 계속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처럼 볼프강은 취직문제부터 시작해서 결혼문제까지 아빠 말을 듣지 않았으며, 레오폴트는 기껏 키워놨더니 삐딱선만 타는 아들에 대한 걱정을 끌어안고 178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분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피소드/2017년#s-7|2017년 2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 딸 나넬은 모친의 사망 이후 집안의 가사를 대신 맡았으며 그 때문인지 당시에는 매우 늦은 나이였던 32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나마 말년의 레오폴트는 딸 나넬이 늦은 나이에 낳은 손자를 엄청나게 좋아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외손자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다만 볼프강이 무조건 아버지의 속만 썩였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비인에서 드디어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고 [[요제프 하이든]]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음악인들이 자신의 아들을 극찬하자 이에 고무된 레오폴트는 1785년 2월 빈에 있는 아들의 집을 깜짝 방문했다. 이 때 부자간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으며 며느리와의 앙금도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한다. 1787년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는 볼프강은 너무 바쁜데다 잘츠부르크까지 너무 멀어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볼프강은 이 때 한참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작곡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비우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부친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은 너무한 처사이긴 하다.], 그 후 볼프강도 4년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누나 나넬과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묘는 집안 사람 네 명, 즉 며느리 콘스탄체 베버 모차르트와 그녀의 이모 제노베파 베버, 나넬의 딸 자네테 베르톨트 폰 존넨부르크, 장모 오이프로시나 페르틀과 함께 있다. 생전에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며느리 콘스탄체와 함께 묻혀 있는 것이 놀라운데,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 사유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의 콘스탄체 부분을 참고 바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